역리(逆理) - Paradox - 2
원작 : 사키야 하루히
--- 에이, 14세, 여름.
촤악, 문 밖에서 물 소리가 났다. 책상앞에 앉아 크로키북을 펼치고 있었던 에이는, 뒤이어 아버지의 귀가 찢어질것같은 무서운 노성이 울려퍼지는 것을 듣고서 한숨을 쉬었다.
에이의 방은 넓은 집 안에서도 가장 문쪽에 가까운곳에 있다. 그 때문에 아버지인 이치노미야 세이란(一之宮 清嵐)이 방문객과 다투는 일따위를 자주 듣는 일이 많았다.
또 젊은 화상(畵商)이 왔나, 질리지도 않고 두드려맞고 내쫓기고 있겠지. 매번 이런 시골까지 잘도 찾아온다고 기가막히지도 차지도 않는다.
평소라면 그대로 내버려뒀을터였다. 그러나 다시한번 물이 뿌려지는 소리가 난 후에 [우왓]하는 비명이 들려와서 화들짝 놀랐다.
[설마, 사람한테 뿌린거야?]
중얼거리면서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이 집에는 아직 수도는 들어오지 않는다. 뒷마당에 우물이 있어서 문 근처나 현관앞에는 물을 길어올리는 나무통을 두고있는데, 그건 정원수에 주기위해 있는 물이라서 목욕하고 남은 물이거나 쌀뜨물이거나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더러운 물을 아무리 초대받지 못하는 손님이라곤 해도 머리위에서부터 뿌린다고 하면....
완고한 아버지라면 그럴 법 했다. 파랗게 질려서 에이는 방에서 뛰쳐나왔다. 그러자 복도의 반대편에서부터 작업복을 걸친 작은체구의 아버지가 거친 발소리를 내며 걸어 오고 있었다.
[아버지, 방금 그건.]
[냅둬라!]
벌건 얼굴의 세이란은 그렇게 소리를 지르며 자신의 작업실로 들어가버렸다. 쾅 닫혀진 문은 그 후에 그가 열지 않는 한 절대로 열리지 않는다.
내버려두라고 해도, 에이는 그럴 수 없었다.
사교성이 없는 아버지는 늘 사람들과 다투어서 그 탓에 화단에서도 그다지 평판이 좋지 않은 듯 했다.
모처럼 이과회(二科會)회원이 되었는대도 내부에서도 틀어지고 있다는 것 같다.
유일하게, 온후한 성품덕에 세이란과 교류가 있는 오사키(大崎)라는 화상은 [저래서는 선생님에게도 좋지 않은데...]
라는 말을 했었다.
무엇보다 아무리 세이란이 성격이 불같다곤 해도 물을 뿌리는것은 도가 지나치다. 하다못해 아들로서 사과정도는 해야할 것 같았다.
안쪽 현관에서 게타를 신고서 마당으로 나간 에이는 그곳에 정장차림의 남자를 보고서 걸음을 멈췄다.
상대방도 에이의 게타가 정원석을 밟는 소리를 들었는지,갑자기 얼굴을 들어 미소지었다.
[이런.보기 흉한 모습이라 죄송합니다.]
나이는 에이보다도 10살은 위일까. 낭낭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한 남자는 아버지가 끼얹은 물을 뚝뚝 떨어트리고 있었다.
원래는 깔끔하게 빗질로 정리되어있을 앞머리는 흩어져 잘생긴 이마위로 늘어져있다.
그래도 조금도 흉해보이지 않는 아름다운 모습이라고 에이는 생각했다.
젊디 젊은 뺨을 흘러, 끝이 모인 앞머리로 떨어지는 물. 그 모든것이 빛을 머금고 여름의 햇살을 받은 남자 그 자체가 반짝반짝 빛나고 있는 듯이 보였다.
뚫어져라 목소리도 내지 않고서 홀려있던 에이에게 남자는 이상하다는 표정도 짓지 않았다.
영화배우처럼 단정하고 이목구비의 골격이 뚜렷한 얼굴로 생긋 세련된 미소를 띄워보였다.
찌릿할정도로 멋진 모습에 에이의 가슴이 이상하게 고동친다. 한참을 홀려서 말없이 서있기만했던 에이에게 깊은 색의 시선이 향했다.
[......무슨 일 있나요?]
[아뇨......아닙니다.]
황급히 머리를 숙여 에이는 그의 넓은 어깨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저기, 지금 수건.....아, 아니 타올 가져올께요]
말하고 나서야 에이는 수건이라는 말을 쓴 자신의 촌스러움이 창피하다고 생각했다.
화악 뺨을 붉힌 순간, 남자는 마음속까지 들여다본 듯한 눈을 한 다음, 쾌활하게 말했다.
[고맙습니다. 아무리 여름이라곤 해도 역시 이래선 감기에 걸릴 것 같네요.]
[정말 죄송합니다. 옷은 괜찮으신지요.]
[마르고나면 괜찮겠죠.]
그렇게 말해도 질이 좋아보이는 양복의 어깨는 색이 변해서 에이는 은근히 마음을 졸였다.
몸에 걸치고있는 쓰리피스 양복도 그의 당당해보이는 체격에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애당초 이런 시골마을에서는 이렇게 세련된 모습의 사람은 드물다. 게다가 고급스러운 맞춤양복이라고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옷을 입고있는 청년은 본 적도 없다.
카나가와의 시골에서 삐뚤어진 아버지에게 짓눌려 살아가는 에이에게 있어서 도시의 향기를 걸친 그는 영화에서 뛰쳐나온것 처럼 눈이 부셨다.
[저기, 이걸 쓰세요.]
[친절하시네요. 감사합니다.]
연말 선물로 받은 고급타올을 찾아내 내밀자 그는 순간 그 물건의 값을 매기는 듯한 눈빛을 했다.
시골에서 자란 에이에게는 시선이 몸 속까지 내리쬐이는것 같아 무의식적으로 뺨을 붉혔다.
길고 하얀 손가락이 에이에게서 타올을 받았다. 순간 손가락끝이 닿는것 만으로 찌리릿하고 저리는것 같아 에이는 황급히 가늘은 팔을 움츠렸다.
타올로 머리칼과 어깨를 닦아내자 역시나 살짝 얼룩진 티가 났다. 이런 고급스러운 옷을 변상해내라고 하면 아버지는 어쩌시려고 그러나 핏기없는 얼굴을 하고있자 낮고 녹을것 같은 달콤한 목소리가 에이의 의식을 빼앗았다.
[그런데, 당신은 문하생이십니까? 아니면 아드님 이신가요?]
퍼뜩, 에이는 등을 꼿꼿히 펴고서 허리춤에 걸쳐두었던 손을 꽈악 쥐었다.
[아, 네. 이치노미야 에이, 입니다. 아버지가 대단히 실례를 범했습니다.]
에이는 가슴이 잘못된건 아닌가 싶을정도의 가슴의 고동을 느꼈다. 당황해서 얼굴을 붉히는 소년을 앞에 두고서 남자는 어디까지나 우아한 몸짓으로 달콤한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저야말로 실례. 인사가 늦었습니다. 저는 후쿠다 코우지 라고 합니다. 작은 화랑업을 하고 있습니다.]
내밀어진 명함에는 도쿄, 니혼바시의 주소가 표기되어 있었다. 이 젊은 나이에 도심의 제일 좋은 곳에서 사업을 하고 있는건가. 에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존경의 눈빛을 숨기지 않았다.
[에이 씨도 그림을 그리시나요?]
[에?]
명함만 뚫어져라 보고있었던 에이는 갑작스런 질문에 놀랐다.
[손바닥의 여기에 검은 가루가...]
후쿠다는 오른손 손목에서부터 손바닥 근처까지를 스윽 긴 손가락으로 어루만졌다. 놀란 에이가 떨었다.
[아아, 이건 연필가루가 아니네요. 목탄의....]
지적하고있는 후쿠다에게 뭔가 아주 부끄러운 것을 보인듯한 기분이 들어 에이는 팔을 등 뒤로 돌렸다.
(부끄러워)
새까맣게 더럽혀진 손끝은 그렇지 않아도 거칠었다.
이 집에선 쇼와 후기가 되어도 아직 옛날방식의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미 전기밥솥이나 가스로 데우는 욕탕따위도 일반가정에 보급되어 있었다.
냉장고의 보급율도 일반가정에선 50퍼센트를 넘어셨다는데, 아직도 보존은 우물물이나 지붕 위.
밥을 지을때는 가마솥을 쓰고 목욕물을 데우는것도 아직까지 장작을 쓰고있다. 그러한 노동을 하는것은 전부 에이였기때문에 가늘은 손가락은 매일 일에 치여 갈라졌다.
원래부터 이 집에서 태어나 자랐다고는 해도 에이는 생가의 환경이 불만이었다.
도쿄올림픽 덕분에 이 시골집에도 칼라 텔레비젼이 들어왔지만, 거기에서 흘러넘치는 대량의 정보는 에이에게 있어서 도시의 동경을 키워주기만 한것이 아니라 강한 울분까지 가져왔다.
(내 손은, 더러워)
눈 앞의 후쿠다의 손은 하얗고 아름답다. 그에 비해 아무리봐도 때가 끼고 더러운것 같은 자신이 부끄러워 에이는 작게 몸을 움츠렸다.
[왜 그러시죠?]
과민한 반응에 남자의 긴 속눈썹이 가볍게 떨린다. 다정한 물음에 시골 촌놈의 수치따위는 들키고 싶지 않아서 에이는 목탄가루로 더러워진 손을 난폭하게 문질렀다.
[아버지에겐, 아버지에겐 비밀로 해주세요.]
[비밀? 왜죠? 아드님까지 그림의 길에 들어서는것을 선생님께선 반대하시나요?]
[그건...그분이 말하는 대로의 그림을 그릴때만...이예요.]
긴장으로 새파래진 얼굴로 에이는 토해내듯 말했다. 후쿠다가 어떤 사람인지도 알지 못한 상태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것은 좀 이상하다. 하지만, 쌓여있던 답답함은 한계에 달해 있었다.
본격적으로 유화를 배우고 싶다고, 미술학교에 가고싶다고 말했을 때 아버지는 일본화가의 아들이 무슨 소릴하냐며 일축했다. 본래 이 일대를 다스렸던 지주이기도 한 이치노미야가의 후계자였던 세이란은 도쿄이술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일본화가가 되려고 했었다.
하지만, 시대가 안 좋아 졸업후에 바로 징병. 퇴역하고 나서 돌아온 곳엔 가족도 전부 다 잃고서 에이의 어머니도 힘든 출산 끝에 에이를 낳자마자 세상을 떠났다.
남겨진건 광대한 토지와 유산뿐. 그리고 전쟁으로인해 사람을 싫어하고 삐뚤어진 성격이 더 심하진 아버지를 두고서 인간관계가 급급하게 잦은 화단의 사람들은 그의 그림을 [부자의 도락]이라고 비꼬았다.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원인이라고 할 에이에 대해서도 곤란해하는것도 알고있다.
함께 살고있어도 최저한의 의사소통을 하는 정도로 마음의 교류따윈 없는것과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아무대나 내버려두면 좋을텐데 거스르는것도, 떨어져 사는것도 허락하지 않은 채 입을 열기만 하면
[넌 그냥 시키는대로 하면 된다.] 하며 고함만 지른다.
에이는 그런 아버지와 둘이서 있는건 견딜 수 없었다. 주변에는 아무런 자극도 없고 이런 생기없는 환경에 있는 견딜 수 없는 괴로움.
언제까지 시골 촌구석에서 썩어 있을 순 없다. 언젠가 도쿄에 가서 여러가지것들을 배우고싶다는 마음이 세이란을 향한 반발감과 더해져 나날이 커져만 갔다.
[아버진 당신이 알고계시는 그대로의 성격이세요. 생각도 완고하시고, 제멋대로죠. 서양화를, 유화를 배우고 싶다고해도.....]
[에이 씨가 배우고 싶어하는것을, 허락하지 않으신다고요?]
꾸벅하고 고개를 끄덕인 에이에게 후쿠다는 [흠] 하고 생각하는 얼굴을 했다. 난처한듯이 눈썹을 찡그리는것을 보고서 그제서야 자신이 첫대면인 남자에게 갑자기 불평을, 그것도 가족의 치부를 흘려버렸다는 부끄러운 짓을 한 것을 알고 얼굴이 벌개졌다.
[죄송합니다. 당신에겐 아무 관계도 없는 일을]
[아뇨아뇨. 그것보다 만약 괜찮으시다면, 저에게 그림을 보여주실 수 있으신가요?]
갑작스런 요청에 에이는 눈이 휘둥그래졌다. 후쿠다는 방긋 미소지으며 [저도 미술학교에서 화방에서 배운적이 있어요.] 하며 매혹적인 저음으로 말했다.
[안타깝게도 그쪽 방면으론 싹을 틔우지 못했지만요. 저 자신도 학생시절에 주변의 환경이나 돈이 없어 결국 예술에 몸을 담을 수 가 없었습니다.]
[그러셨나요?]
[네. 역시 부모도 저를 이해해주지 않으셔서요. 결국 지금은 연락을 끊은 상태이고, 에이 씨의 지금의 고통도 이해합니다.]
후쿠다의 말에 에이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공감을 느꼈다. 마치 에이의 마음을 손에 쥐듯이 알고있는것 같다고, 그런 달콤함에 가슴이 설래었다.
[환경이나 정황에 져서 젊은 재능을 잃어버리는건 아깝습니다. 그러기에 화상으로서 누군가의 힘이 되고 싶어요.]
지긋이 눈을 바라본다. 당당한 어른의 남자에게 예우받고이는것에 에이는 왠지 자신이 굉장한 존재라고 된 듯한 착각에 빠졌다.
[제가 전공한것도 유화니까요. 조금은 어드바이스가 될지도 모릅니다.]
[저, 정말인가요?]
그러니 그림을 보여달라고 두번 세번 부탁해왔다. 그런 말에 굶주려있었던 에이는 군소리없이 별채로 안내했다.
그리고나서 지금까지 그려둔 대량의 그림을 후쿠다에게 조심스래 내밀었다.
[그냥 독학으로...부끄럽습니다만.]
몰래 모아둔 화구들은 집에 드나드는 오사키에게 아버지에겐 비밀로 해달라며 졸라서 얻은 것들이었다.
세이란은 이 별채에 스스로 찾아오는 일이 없다. 대개는 자신의 작업실에 갇혀살았기 때문이다.
[어떤가요.]
에이의 그림을 앞에두고서 후쿠다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역시 촌뜨기 어린애가 분수도 모른다고 비웃고있을까.
마치 자기 자신을 평가당하는듯한 침묵에 가슴이 떨렸다.
하지만, 침묵끝에 후쿠다는 눈을 빛내며 황홀한듯 숨을 내쉬며 말했다.
[......정말로 아무것도 배우지 않고, 아무에게도 사사받지 않고, 혼자서 이걸?]
[아, 네. 화집같은것은 모사해봤습니다만, 나머진 예전에 봤던걸 기억해서......]
아직 에이가 어렸을적에는 세이란의 친분으로 미술전시회에도 갔었었다. 그 때 세이란의 그림이 아닌 다른 장소에 전시되어있었던 힘있는 유화에 마음이 설레어 견딜 수 없었것이 계기였다.
양식미를 지키며 밋밋한 색감의 일본화는 전통이 있는 만큼 파벌의 힘도 쎄다.누군가의 사사를 받지 않으면 살아가기가 힘들다는 적나라한 이야기도 귀에 못이박힐정도로 들었던 탓에 에이는 일본화의 세계 그 자체에 답답함밖에 느끼지 못했다. 그 속에서 혼자서 싸우는 세이란도 결국은 시골에 처박혀 패배자처럼 살고있다고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그것보다도 에이는 그 진하고 무거운 격정을 그대로 화폭에 때려넣은 듯한 그림에 감명을 받았다.
많은 해외의 화가들이 가난한 생활속에서도 자신을 갈고 닦아 혼을 담아 그림을 그렸다고하는 일화도 울분이 많은 젋은 에이의 마음을 흔들었다.
[그런 그림을 그릴 수 있다면...하고 생각했어요. 저만의, 나만의 그림을. 절대로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냥 그리고 싶어요.]
변변치 못한 풋내나는 이상론을 후쿠다는 부정하지 않았다. [압니다.] 하며 온화하게 웃으며 약간 어려운 얼굴을 한다.
[하지만, 그림을 계속 그리려면 환경이 필요합니다. 혼자서 공부하는것엔 한계가 있죠. 좁은 환경에 있으면 그것이 전부라고 착각할 수도 있을 뿐만 아니라, 기술도 늘지 않아요.]
[....네.]
반박할 말도 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그것이야 말로 에이가 걱정했던 부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후쿠다의 눈에는 역시나 자신의 그림따위는 재미없는 종이조각에 불과했겠지.
자신이 분수도 모르는 어린애라는 자각은 있었고, 지식욕은 있어도 채워지지 않는다. 그것이 욕구불만을 더더욱 악화시키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 방법이 없다. 오사키는 세이란 몰래 화구나 다른것들을 몰래 건내주지만 어디까지나 그건 『세이란의 아이에게 주는 선물』일 뿐이었고 진심으로 그 아버지를 거스르면서까지 에이의 후원을 해주지는 않는다. 대체 어떻게 하면.....고개를 떨구고 입술을 깨물자, 후쿠다가 말했다.
[저라도 괜찮다면, 힘이 되어 드릴까요.]
[엣.]
얼굴을 들자, 후쿠다의 든든한 미소가 그곳에 있었다.
[당신에게 그림을 가르쳐주고 싶습니다. 전문적인 학교에 다니는것은 이 집에 있어선 어려울지 모르지만, 제가 가지고있는 지식도 괜찮다면, 당신에게 가르쳐주고 싶습니다.]
[그, 그렇지만, 왜.]
이유를 모르겠다며 에이는 고개를 젓다가 문득 생각났다.
[저, 저기. 저에게서 아버지에게 뭔가를 부탁하려 하신다면 못합니다. 그 분은 제가 말하는건 듣지를 않으시고 오히려 중재를 하려 한다는걸 알면 오히려......]
[아아, 그런게 아닙니다. 에이 씨. 진정하세요.]
힘이 될 수 는 없다고 말하는 에이를 후쿠다는 쭉 뻗은 손가락으로 막핬다.그 검지손가락은 왜인지 에이의 입술 위에서 멈췄다.
손끝에선 독특하고 달콤한 냄새가 났다. 후에 그것이 그가 태우는 권련과 향수가 섞인 향기라는걸 알게됐지만, 그 당시의 에이는 단지 어지러운 달콤함에 현기증을 느낄 뿐이었다.
[세이란선생님의 일은 아직은 관계없습니다. 전 에이 씨. 당신의 이야기를 하고있으니까요.]
알겠나요? 하며 천천히 입술을 더듬는 손가락이 떨어져갔다. 찌릿찌릿하게 떨리는 등에 필사적으로 힘을 주며 에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붉어진 뺨을 보며 만족스럽게 웃으며 후쿠다가 말했다.
[확실히 거칠기는 하지만,아무것도 누구에게도 배우지 않은 채 이렇게까지 할 수 있다면, 제대로 기술을 가르쳐주고 싶어요. 분명 크게 될겁니다.]
[그, 그렇다면!]
기대와 흥분에 에이가 눈을 빛내자, 후쿠다는 덧붙였다.
[한동안은 세이란 선생님에게는 비밀로 이쪽으로 오겠습니다. 당신도 외출정도는 할 수 있지요?]
[네. 시간만 지킨아면......아니, 어떻게든 하게습니다. 할겁니다!]
[이정도의 재능을 묻히게하는건 너무나 아까워요. 에이 씨는 분명, 저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 화가가 될겁니다.]
자신의 존재를 인정해달라고 필사적으로 기도하던 소년에게 있어서 너무나 감미로운 말이었다.
필사적으로 눈앞에 내밀어진 먹이를 에이는 물었다. 그것이 그토록 바라던 구원이었다고 ---- 그것이 자신을 옭아매기위한 독거미의 줄이라는것을 모른 채,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은 채, 후쿠다의 손을 잡고 말았다.
흥분한 채로 에이와 후쿠다는 그 뒤에 긴 대화를 했다. 좋아하는 화가의 계통도 이상론도 후쿠다는 가끔은 에이의 유치함을 타이르면서도 대부분 [그렇죠]하며 긍정하고, 격려해주었다.
너무나도 그대로, 게다가 첫대면에 모든것을 다 받아들이는것이 얼마나 위험한것인지를 어린 에이는 몰랐다.
그리고 10살도 연상인 남자가 어린애의 무지함에 파고드는것이 얼마나 쉬운것인지조차, 물론 이해조차 하지 못했다.
그저 이 사람밖에 없다며, 단 한번밖에 만난적이 없는 남자의 모든것을 믿어버렸다.
[......처음 뵙는데, 이상하게도 마음이 통하는 기분이 들어요.]
[저, 저도, 저도예요!]
눈앞의 남자에게선 에이가 동경해 마지않던 도시의 소탈한 냄새가 났다. 전신에 넘처흐르는, 상류층인간 특유의 오만함마져 이 당시의 에이에겐 눈부신것으로밖에 비춰지지 않아서 ---- 울분때문에 그 안에 있는 잔혹성따위를 읽어낼 정도로 14살의 에이는 단련되어있지 않았다.
대화를 하는 동안에 날이 저물어가고 있었다. 헤어져야 할 무렵, 세이란 몰래 후쿠다를 차가 있는 곳까지 배웅하던 때에 그는 허리를 굽혀 에이의 손을 잡았다.
[꼭 다시 오겠습니다. 다음주에.]
[기다리겠습니다.]
잡아 쥔 손등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후쿠다의 손가락에 아무런 꿍꿍이도 느껴지지 않았다.
어쩌면----알고있어도, 일부러 모른척 했을지도 모른다.
빛나는 미모의 남자가 에이를 칭찬해주고 이끌어 준다는것에 취해했는 순간에는 피부의 부드러움을 확인해보는 남자의 손길따위는 사소한 것이었다.
(2009/06/23 01:36)
원작 : 사키야 하루히
--- 에이, 14세, 여름.
촤악, 문 밖에서 물 소리가 났다. 책상앞에 앉아 크로키북을 펼치고 있었던 에이는, 뒤이어 아버지의 귀가 찢어질것같은 무서운 노성이 울려퍼지는 것을 듣고서 한숨을 쉬었다.
에이의 방은 넓은 집 안에서도 가장 문쪽에 가까운곳에 있다. 그 때문에 아버지인 이치노미야 세이란(一之宮 清嵐)이 방문객과 다투는 일따위를 자주 듣는 일이 많았다.
또 젊은 화상(畵商)이 왔나, 질리지도 않고 두드려맞고 내쫓기고 있겠지. 매번 이런 시골까지 잘도 찾아온다고 기가막히지도 차지도 않는다.
평소라면 그대로 내버려뒀을터였다. 그러나 다시한번 물이 뿌려지는 소리가 난 후에 [우왓]하는 비명이 들려와서 화들짝 놀랐다.
[설마, 사람한테 뿌린거야?]
중얼거리면서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이 집에는 아직 수도는 들어오지 않는다. 뒷마당에 우물이 있어서 문 근처나 현관앞에는 물을 길어올리는 나무통을 두고있는데, 그건 정원수에 주기위해 있는 물이라서 목욕하고 남은 물이거나 쌀뜨물이거나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더러운 물을 아무리 초대받지 못하는 손님이라곤 해도 머리위에서부터 뿌린다고 하면....
완고한 아버지라면 그럴 법 했다. 파랗게 질려서 에이는 방에서 뛰쳐나왔다. 그러자 복도의 반대편에서부터 작업복을 걸친 작은체구의 아버지가 거친 발소리를 내며 걸어 오고 있었다.
[아버지, 방금 그건.]
[냅둬라!]
벌건 얼굴의 세이란은 그렇게 소리를 지르며 자신의 작업실로 들어가버렸다. 쾅 닫혀진 문은 그 후에 그가 열지 않는 한 절대로 열리지 않는다.
내버려두라고 해도, 에이는 그럴 수 없었다.
사교성이 없는 아버지는 늘 사람들과 다투어서 그 탓에 화단에서도 그다지 평판이 좋지 않은 듯 했다.
모처럼 이과회(二科會)회원이 되었는대도 내부에서도 틀어지고 있다는 것 같다.
유일하게, 온후한 성품덕에 세이란과 교류가 있는 오사키(大崎)라는 화상은 [저래서는 선생님에게도 좋지 않은데...]
라는 말을 했었다.
무엇보다 아무리 세이란이 성격이 불같다곤 해도 물을 뿌리는것은 도가 지나치다. 하다못해 아들로서 사과정도는 해야할 것 같았다.
안쪽 현관에서 게타를 신고서 마당으로 나간 에이는 그곳에 정장차림의 남자를 보고서 걸음을 멈췄다.
상대방도 에이의 게타가 정원석을 밟는 소리를 들었는지,갑자기 얼굴을 들어 미소지었다.
[이런.보기 흉한 모습이라 죄송합니다.]
나이는 에이보다도 10살은 위일까. 낭낭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한 남자는 아버지가 끼얹은 물을 뚝뚝 떨어트리고 있었다.
원래는 깔끔하게 빗질로 정리되어있을 앞머리는 흩어져 잘생긴 이마위로 늘어져있다.
그래도 조금도 흉해보이지 않는 아름다운 모습이라고 에이는 생각했다.
젊디 젊은 뺨을 흘러, 끝이 모인 앞머리로 떨어지는 물. 그 모든것이 빛을 머금고 여름의 햇살을 받은 남자 그 자체가 반짝반짝 빛나고 있는 듯이 보였다.
뚫어져라 목소리도 내지 않고서 홀려있던 에이에게 남자는 이상하다는 표정도 짓지 않았다.
영화배우처럼 단정하고 이목구비의 골격이 뚜렷한 얼굴로 생긋 세련된 미소를 띄워보였다.
찌릿할정도로 멋진 모습에 에이의 가슴이 이상하게 고동친다. 한참을 홀려서 말없이 서있기만했던 에이에게 깊은 색의 시선이 향했다.
[......무슨 일 있나요?]
[아뇨......아닙니다.]
황급히 머리를 숙여 에이는 그의 넓은 어깨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저기, 지금 수건.....아, 아니 타올 가져올께요]
말하고 나서야 에이는 수건이라는 말을 쓴 자신의 촌스러움이 창피하다고 생각했다.
화악 뺨을 붉힌 순간, 남자는 마음속까지 들여다본 듯한 눈을 한 다음, 쾌활하게 말했다.
[고맙습니다. 아무리 여름이라곤 해도 역시 이래선 감기에 걸릴 것 같네요.]
[정말 죄송합니다. 옷은 괜찮으신지요.]
[마르고나면 괜찮겠죠.]
그렇게 말해도 질이 좋아보이는 양복의 어깨는 색이 변해서 에이는 은근히 마음을 졸였다.
몸에 걸치고있는 쓰리피스 양복도 그의 당당해보이는 체격에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애당초 이런 시골마을에서는 이렇게 세련된 모습의 사람은 드물다. 게다가 고급스러운 맞춤양복이라고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옷을 입고있는 청년은 본 적도 없다.
카나가와의 시골에서 삐뚤어진 아버지에게 짓눌려 살아가는 에이에게 있어서 도시의 향기를 걸친 그는 영화에서 뛰쳐나온것 처럼 눈이 부셨다.
[저기, 이걸 쓰세요.]
[친절하시네요. 감사합니다.]
연말 선물로 받은 고급타올을 찾아내 내밀자 그는 순간 그 물건의 값을 매기는 듯한 눈빛을 했다.
시골에서 자란 에이에게는 시선이 몸 속까지 내리쬐이는것 같아 무의식적으로 뺨을 붉혔다.
길고 하얀 손가락이 에이에게서 타올을 받았다. 순간 손가락끝이 닿는것 만으로 찌리릿하고 저리는것 같아 에이는 황급히 가늘은 팔을 움츠렸다.
타올로 머리칼과 어깨를 닦아내자 역시나 살짝 얼룩진 티가 났다. 이런 고급스러운 옷을 변상해내라고 하면 아버지는 어쩌시려고 그러나 핏기없는 얼굴을 하고있자 낮고 녹을것 같은 달콤한 목소리가 에이의 의식을 빼앗았다.
[그런데, 당신은 문하생이십니까? 아니면 아드님 이신가요?]
퍼뜩, 에이는 등을 꼿꼿히 펴고서 허리춤에 걸쳐두었던 손을 꽈악 쥐었다.
[아, 네. 이치노미야 에이, 입니다. 아버지가 대단히 실례를 범했습니다.]
에이는 가슴이 잘못된건 아닌가 싶을정도의 가슴의 고동을 느꼈다. 당황해서 얼굴을 붉히는 소년을 앞에 두고서 남자는 어디까지나 우아한 몸짓으로 달콤한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저야말로 실례. 인사가 늦었습니다. 저는 후쿠다 코우지 라고 합니다. 작은 화랑업을 하고 있습니다.]
내밀어진 명함에는 도쿄, 니혼바시의 주소가 표기되어 있었다. 이 젊은 나이에 도심의 제일 좋은 곳에서 사업을 하고 있는건가. 에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존경의 눈빛을 숨기지 않았다.
[에이 씨도 그림을 그리시나요?]
[에?]
명함만 뚫어져라 보고있었던 에이는 갑작스런 질문에 놀랐다.
[손바닥의 여기에 검은 가루가...]
후쿠다는 오른손 손목에서부터 손바닥 근처까지를 스윽 긴 손가락으로 어루만졌다. 놀란 에이가 떨었다.
[아아, 이건 연필가루가 아니네요. 목탄의....]
지적하고있는 후쿠다에게 뭔가 아주 부끄러운 것을 보인듯한 기분이 들어 에이는 팔을 등 뒤로 돌렸다.
(부끄러워)
새까맣게 더럽혀진 손끝은 그렇지 않아도 거칠었다.
이 집에선 쇼와 후기가 되어도 아직 옛날방식의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미 전기밥솥이나 가스로 데우는 욕탕따위도 일반가정에 보급되어 있었다.
냉장고의 보급율도 일반가정에선 50퍼센트를 넘어셨다는데, 아직도 보존은 우물물이나 지붕 위.
밥을 지을때는 가마솥을 쓰고 목욕물을 데우는것도 아직까지 장작을 쓰고있다. 그러한 노동을 하는것은 전부 에이였기때문에 가늘은 손가락은 매일 일에 치여 갈라졌다.
원래부터 이 집에서 태어나 자랐다고는 해도 에이는 생가의 환경이 불만이었다.
도쿄올림픽 덕분에 이 시골집에도 칼라 텔레비젼이 들어왔지만, 거기에서 흘러넘치는 대량의 정보는 에이에게 있어서 도시의 동경을 키워주기만 한것이 아니라 강한 울분까지 가져왔다.
(내 손은, 더러워)
눈 앞의 후쿠다의 손은 하얗고 아름답다. 그에 비해 아무리봐도 때가 끼고 더러운것 같은 자신이 부끄러워 에이는 작게 몸을 움츠렸다.
[왜 그러시죠?]
과민한 반응에 남자의 긴 속눈썹이 가볍게 떨린다. 다정한 물음에 시골 촌놈의 수치따위는 들키고 싶지 않아서 에이는 목탄가루로 더러워진 손을 난폭하게 문질렀다.
[아버지에겐, 아버지에겐 비밀로 해주세요.]
[비밀? 왜죠? 아드님까지 그림의 길에 들어서는것을 선생님께선 반대하시나요?]
[그건...그분이 말하는 대로의 그림을 그릴때만...이예요.]
긴장으로 새파래진 얼굴로 에이는 토해내듯 말했다. 후쿠다가 어떤 사람인지도 알지 못한 상태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것은 좀 이상하다. 하지만, 쌓여있던 답답함은 한계에 달해 있었다.
본격적으로 유화를 배우고 싶다고, 미술학교에 가고싶다고 말했을 때 아버지는 일본화가의 아들이 무슨 소릴하냐며 일축했다. 본래 이 일대를 다스렸던 지주이기도 한 이치노미야가의 후계자였던 세이란은 도쿄이술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일본화가가 되려고 했었다.
하지만, 시대가 안 좋아 졸업후에 바로 징병. 퇴역하고 나서 돌아온 곳엔 가족도 전부 다 잃고서 에이의 어머니도 힘든 출산 끝에 에이를 낳자마자 세상을 떠났다.
남겨진건 광대한 토지와 유산뿐. 그리고 전쟁으로인해 사람을 싫어하고 삐뚤어진 성격이 더 심하진 아버지를 두고서 인간관계가 급급하게 잦은 화단의 사람들은 그의 그림을 [부자의 도락]이라고 비꼬았다.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원인이라고 할 에이에 대해서도 곤란해하는것도 알고있다.
함께 살고있어도 최저한의 의사소통을 하는 정도로 마음의 교류따윈 없는것과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아무대나 내버려두면 좋을텐데 거스르는것도, 떨어져 사는것도 허락하지 않은 채 입을 열기만 하면
[넌 그냥 시키는대로 하면 된다.] 하며 고함만 지른다.
에이는 그런 아버지와 둘이서 있는건 견딜 수 없었다. 주변에는 아무런 자극도 없고 이런 생기없는 환경에 있는 견딜 수 없는 괴로움.
언제까지 시골 촌구석에서 썩어 있을 순 없다. 언젠가 도쿄에 가서 여러가지것들을 배우고싶다는 마음이 세이란을 향한 반발감과 더해져 나날이 커져만 갔다.
[아버진 당신이 알고계시는 그대로의 성격이세요. 생각도 완고하시고, 제멋대로죠. 서양화를, 유화를 배우고 싶다고해도.....]
[에이 씨가 배우고 싶어하는것을, 허락하지 않으신다고요?]
꾸벅하고 고개를 끄덕인 에이에게 후쿠다는 [흠] 하고 생각하는 얼굴을 했다. 난처한듯이 눈썹을 찡그리는것을 보고서 그제서야 자신이 첫대면인 남자에게 갑자기 불평을, 그것도 가족의 치부를 흘려버렸다는 부끄러운 짓을 한 것을 알고 얼굴이 벌개졌다.
[죄송합니다. 당신에겐 아무 관계도 없는 일을]
[아뇨아뇨. 그것보다 만약 괜찮으시다면, 저에게 그림을 보여주실 수 있으신가요?]
갑작스런 요청에 에이는 눈이 휘둥그래졌다. 후쿠다는 방긋 미소지으며 [저도 미술학교에서 화방에서 배운적이 있어요.] 하며 매혹적인 저음으로 말했다.
[안타깝게도 그쪽 방면으론 싹을 틔우지 못했지만요. 저 자신도 학생시절에 주변의 환경이나 돈이 없어 결국 예술에 몸을 담을 수 가 없었습니다.]
[그러셨나요?]
[네. 역시 부모도 저를 이해해주지 않으셔서요. 결국 지금은 연락을 끊은 상태이고, 에이 씨의 지금의 고통도 이해합니다.]
후쿠다의 말에 에이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공감을 느꼈다. 마치 에이의 마음을 손에 쥐듯이 알고있는것 같다고, 그런 달콤함에 가슴이 설래었다.
[환경이나 정황에 져서 젊은 재능을 잃어버리는건 아깝습니다. 그러기에 화상으로서 누군가의 힘이 되고 싶어요.]
지긋이 눈을 바라본다. 당당한 어른의 남자에게 예우받고이는것에 에이는 왠지 자신이 굉장한 존재라고 된 듯한 착각에 빠졌다.
[제가 전공한것도 유화니까요. 조금은 어드바이스가 될지도 모릅니다.]
[저, 정말인가요?]
그러니 그림을 보여달라고 두번 세번 부탁해왔다. 그런 말에 굶주려있었던 에이는 군소리없이 별채로 안내했다.
그리고나서 지금까지 그려둔 대량의 그림을 후쿠다에게 조심스래 내밀었다.
[그냥 독학으로...부끄럽습니다만.]
몰래 모아둔 화구들은 집에 드나드는 오사키에게 아버지에겐 비밀로 해달라며 졸라서 얻은 것들이었다.
세이란은 이 별채에 스스로 찾아오는 일이 없다. 대개는 자신의 작업실에 갇혀살았기 때문이다.
[어떤가요.]
에이의 그림을 앞에두고서 후쿠다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역시 촌뜨기 어린애가 분수도 모른다고 비웃고있을까.
마치 자기 자신을 평가당하는듯한 침묵에 가슴이 떨렸다.
하지만, 침묵끝에 후쿠다는 눈을 빛내며 황홀한듯 숨을 내쉬며 말했다.
[......정말로 아무것도 배우지 않고, 아무에게도 사사받지 않고, 혼자서 이걸?]
[아, 네. 화집같은것은 모사해봤습니다만, 나머진 예전에 봤던걸 기억해서......]
아직 에이가 어렸을적에는 세이란의 친분으로 미술전시회에도 갔었었다. 그 때 세이란의 그림이 아닌 다른 장소에 전시되어있었던 힘있는 유화에 마음이 설레어 견딜 수 없었것이 계기였다.
양식미를 지키며 밋밋한 색감의 일본화는 전통이 있는 만큼 파벌의 힘도 쎄다.누군가의 사사를 받지 않으면 살아가기가 힘들다는 적나라한 이야기도 귀에 못이박힐정도로 들었던 탓에 에이는 일본화의 세계 그 자체에 답답함밖에 느끼지 못했다. 그 속에서 혼자서 싸우는 세이란도 결국은 시골에 처박혀 패배자처럼 살고있다고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그것보다도 에이는 그 진하고 무거운 격정을 그대로 화폭에 때려넣은 듯한 그림에 감명을 받았다.
많은 해외의 화가들이 가난한 생활속에서도 자신을 갈고 닦아 혼을 담아 그림을 그렸다고하는 일화도 울분이 많은 젋은 에이의 마음을 흔들었다.
[그런 그림을 그릴 수 있다면...하고 생각했어요. 저만의, 나만의 그림을. 절대로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냥 그리고 싶어요.]
변변치 못한 풋내나는 이상론을 후쿠다는 부정하지 않았다. [압니다.] 하며 온화하게 웃으며 약간 어려운 얼굴을 한다.
[하지만, 그림을 계속 그리려면 환경이 필요합니다. 혼자서 공부하는것엔 한계가 있죠. 좁은 환경에 있으면 그것이 전부라고 착각할 수도 있을 뿐만 아니라, 기술도 늘지 않아요.]
[....네.]
반박할 말도 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그것이야 말로 에이가 걱정했던 부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후쿠다의 눈에는 역시나 자신의 그림따위는 재미없는 종이조각에 불과했겠지.
자신이 분수도 모르는 어린애라는 자각은 있었고, 지식욕은 있어도 채워지지 않는다. 그것이 욕구불만을 더더욱 악화시키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 방법이 없다. 오사키는 세이란 몰래 화구나 다른것들을 몰래 건내주지만 어디까지나 그건 『세이란의 아이에게 주는 선물』일 뿐이었고 진심으로 그 아버지를 거스르면서까지 에이의 후원을 해주지는 않는다. 대체 어떻게 하면.....고개를 떨구고 입술을 깨물자, 후쿠다가 말했다.
[저라도 괜찮다면, 힘이 되어 드릴까요.]
[엣.]
얼굴을 들자, 후쿠다의 든든한 미소가 그곳에 있었다.
[당신에게 그림을 가르쳐주고 싶습니다. 전문적인 학교에 다니는것은 이 집에 있어선 어려울지 모르지만, 제가 가지고있는 지식도 괜찮다면, 당신에게 가르쳐주고 싶습니다.]
[그, 그렇지만, 왜.]
이유를 모르겠다며 에이는 고개를 젓다가 문득 생각났다.
[저, 저기. 저에게서 아버지에게 뭔가를 부탁하려 하신다면 못합니다. 그 분은 제가 말하는건 듣지를 않으시고 오히려 중재를 하려 한다는걸 알면 오히려......]
[아아, 그런게 아닙니다. 에이 씨. 진정하세요.]
힘이 될 수 는 없다고 말하는 에이를 후쿠다는 쭉 뻗은 손가락으로 막핬다.그 검지손가락은 왜인지 에이의 입술 위에서 멈췄다.
손끝에선 독특하고 달콤한 냄새가 났다. 후에 그것이 그가 태우는 권련과 향수가 섞인 향기라는걸 알게됐지만, 그 당시의 에이는 단지 어지러운 달콤함에 현기증을 느낄 뿐이었다.
[세이란선생님의 일은 아직은 관계없습니다. 전 에이 씨. 당신의 이야기를 하고있으니까요.]
알겠나요? 하며 천천히 입술을 더듬는 손가락이 떨어져갔다. 찌릿찌릿하게 떨리는 등에 필사적으로 힘을 주며 에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붉어진 뺨을 보며 만족스럽게 웃으며 후쿠다가 말했다.
[확실히 거칠기는 하지만,아무것도 누구에게도 배우지 않은 채 이렇게까지 할 수 있다면, 제대로 기술을 가르쳐주고 싶어요. 분명 크게 될겁니다.]
[그, 그렇다면!]
기대와 흥분에 에이가 눈을 빛내자, 후쿠다는 덧붙였다.
[한동안은 세이란 선생님에게는 비밀로 이쪽으로 오겠습니다. 당신도 외출정도는 할 수 있지요?]
[네. 시간만 지킨아면......아니, 어떻게든 하게습니다. 할겁니다!]
[이정도의 재능을 묻히게하는건 너무나 아까워요. 에이 씨는 분명, 저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 화가가 될겁니다.]
자신의 존재를 인정해달라고 필사적으로 기도하던 소년에게 있어서 너무나 감미로운 말이었다.
필사적으로 눈앞에 내밀어진 먹이를 에이는 물었다. 그것이 그토록 바라던 구원이었다고 ---- 그것이 자신을 옭아매기위한 독거미의 줄이라는것을 모른 채,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은 채, 후쿠다의 손을 잡고 말았다.
흥분한 채로 에이와 후쿠다는 그 뒤에 긴 대화를 했다. 좋아하는 화가의 계통도 이상론도 후쿠다는 가끔은 에이의 유치함을 타이르면서도 대부분 [그렇죠]하며 긍정하고, 격려해주었다.
너무나도 그대로, 게다가 첫대면에 모든것을 다 받아들이는것이 얼마나 위험한것인지를 어린 에이는 몰랐다.
그리고 10살도 연상인 남자가 어린애의 무지함에 파고드는것이 얼마나 쉬운것인지조차, 물론 이해조차 하지 못했다.
그저 이 사람밖에 없다며, 단 한번밖에 만난적이 없는 남자의 모든것을 믿어버렸다.
[......처음 뵙는데, 이상하게도 마음이 통하는 기분이 들어요.]
[저, 저도, 저도예요!]
눈앞의 남자에게선 에이가 동경해 마지않던 도시의 소탈한 냄새가 났다. 전신에 넘처흐르는, 상류층인간 특유의 오만함마져 이 당시의 에이에겐 눈부신것으로밖에 비춰지지 않아서 ---- 울분때문에 그 안에 있는 잔혹성따위를 읽어낼 정도로 14살의 에이는 단련되어있지 않았다.
대화를 하는 동안에 날이 저물어가고 있었다. 헤어져야 할 무렵, 세이란 몰래 후쿠다를 차가 있는 곳까지 배웅하던 때에 그는 허리를 굽혀 에이의 손을 잡았다.
[꼭 다시 오겠습니다. 다음주에.]
[기다리겠습니다.]
잡아 쥔 손등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후쿠다의 손가락에 아무런 꿍꿍이도 느껴지지 않았다.
어쩌면----알고있어도, 일부러 모른척 했을지도 모른다.
빛나는 미모의 남자가 에이를 칭찬해주고 이끌어 준다는것에 취해했는 순간에는 피부의 부드러움을 확인해보는 남자의 손길따위는 사소한 것이었다.
(2009/06/23 01: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