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작 : 사키야 하루히
손끝이 살짝 움츠러드는 겨울밤이다. 창밖에선 얼음같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싸구려 아파트의 귀퉁이방은 노후되서인지 눅눅한 냉기가 천천히 스며들어 온다. 추위에 거칠어진 볼을 문지르자 건조한 감촉이 들었다.
책상으로 향해 움츠러든 손가락으로 만년필을 쥐고, 시험삼아 쓰기를 두 번, 세번.
오랜만에 써 보는 몽블랑의 잉크가 썩지 않은 것에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이가 빠진 컵에 한 가득 따른 커피를 홀짝인다. [맛없네]하고 혼잣말을 하고선 이치노미야 에이(一之宮 衛)는 살짝 웃었다.
싸구려 나무의자에 앉은 채로 몸을 비틀자 삐그덕 삐그덕 하는 소리가 난다. 마치 자신의 몸 속에서 나는 소리 같다.
만년필과 함께 올드 파이렉스의 퍼콜레이터 (※여과장치가 달린 커피주전자)를 꺼낸것은 오랜만이다.
끓어오르고 여과하길 반복하는 이 장치에다 끓인 커피가 맛없는건 당연한 일이지만, 드립용 필터나 종이팩을 살 돈도 없으니 별 수 없다.
애당초, 커피원두같은 사치품을 손에 넣는것 자체가 최근의 에이에겐 없었던 일이다.
그런 것을 마실 돈이 있으면 조금이라도 하나뿐인 아들의 먹을것을 사는대 쓰고싶다고 에이는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밤의『손님』이 선물로 두고 간 커피는 이제 막 3살이 된 아이(藍)는 마실 수 없으니, 하는 수 없다.
방금 간 원두인데도, 퍼콜레이터로 끓인 그것은 향도 맛도 형편 없었다. 하지만 따뜻한 커피따위를 마셔보는 일은 오랜만이다. 그것만으로 조금은, 병들은 가슴이 어느정도 편안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왕이면, 우유쪽이 더 좋았는데. 그러면 아이(藍)가 마실 수 있는데]
혼자 중얼거려 보지만 그런 요구를 할 수 있는 입장도 아니라 쓴웃음이 나왔다.
이미 30대 후반이 된 에이이지만, 이 유럽의 나라에선 20대 중반의 청년으로도 보여지지 않았다. 덕분에『팔리지 않는 그림을 사는 대신에』라며 몸 팔기를 강요당한다.
이 몸의 어디에 그런 가치가 있다는건지 놀라웠지만 지금은 팔 수 있는 것이라면 뭐든지 팔고싶다.
좀 전까지만해도, 예전에 배운 농간을 부리며 몸을 비틀었었다. 오랜만에 항문에 삽입되서 꽤 피곤했지만, 젋은시절에 조교가 다 된 몸은 의외로 유연하고 튼튼했다. - 표면적인 것만을 말하자면 이지만.
한숨을 쉬자, 창가의 침대쪽에서는 [파아파?]하는 귀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묵직하게 짓누르던 피곤이 그 사랑스러운 목소리 만으로도 풀린다.
그림도구와 최저한의 가구이외에 아무것도 없는 싼 아파트의 한 켠. 그 끝에 있는 어린이용 침대의 주변만은 밝고 청결하게 해 놓기로 요 3년간 노력하고 있다.
[아이(藍).....아이. 깼니?]
들여다보니 얌전한 우리아기는 쌔액쌔액 잠자는 중이었다. 아무래도 잠꼬대였던 것 같다.
『손님』이 오는것은 아이가 잠들었을 때만으로 한정되어있다. 이 곳과는 커튼을 치고 목소리를 낮추고는 있지만 아이의 의식이 깨어있을때 만큼은 역시나 못할 노릇이다.
깊게 잠드는 아이라서 다행이다. 남자가 자신의 항문에 넣는 소리나 그외의 다른것을 들키지 않은 것을 확인한 후에야 언제나 에이는 안심을 한다.
[파파는 아이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꺼야]
살포시 안아올려도 아이는 깨지 않는다. 아직 우유냄새가 나는듯한 세 살배기는 꽤 무거워졌다. 아이가 무거워진건지 에이의 체력이 떨어진건지 확실히는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이 무게를 무엇보다 기쁘게 고맙게 느낀다.
살짝 숨을 쉰 순간, 가슴의 안쪽에 찌릿하고 타는듯한 통증이 일었다.
[....큿]
콜록, 목의 안쪽이 울려 기침을 참으며 필사적으로 호흡을 가다듬는다. 요즘들어 기침이 심해져서 늑골이 삐끗거린다. 아마도 쇠약해진 몸이 기침에 견디지 못하고 뼈에 금이 간 모양이다.
아이는 꼼지락 꼼지락 눈을 비비며 동그랗게 맑은 눈을 반짝거리며 떴다.
[......파파?]
[아, 아아. 깨워버렸네]
홀린듯이 웃어보이자 아이의 새까만 눈이 멀뚱히 쳐다본다. 어린애의 시선은 동물의 그것과 닮아있다. 깜빡임이 적고 직선적이라 어른의 부정함을 탄 몸이 부끄러워진다.
하지만, 일순의 긴장은 아이의 배에서 들려온 [꾸우욱]하는 귀여운 소리에 풀어져버렸다.
그러고보니, 아직 저녁밥도 먹이지 않았다. 오후에 손님이 와서 심심해진 아이는 그대로 잠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걸 빌미로 이루어진 방 한구석에서의 정사의 피곤함과 양심의 가책이 에이의 가슴속의 애뜻함을 한층 더 무겁게 만든다.
[배 고프지?]
[응....파파는?]
물어봐도 아이는 내쪽을 신경쓰는 말을 먼저 한다. 이렇게 어린 아이인데도, 에이가 피곤하다는걸 잘 알고있다.
눈꼬리가 찡하고 뜨거워진다. 작고 부드러운 몸을 흔들어주면서 에이는 달래는 듯한 말을 한다.
[파파는 좀 피곤하지만 괜찮아. 편지 쓸때까지 기다릴래? 그리고나서 바로 밥 지을께. 조금만 더 자자. 이따가 깨워줄께]
[네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동그란 뺨이 사랑스럽다. 다시 한번 어린아이의 등을 톡톡 두드리고서 재웠다.
좀 더 안고있고 싶지만 어젯밤에 피를 토한지 얼마 안됐다. 깨끗하지 않은 방안에서 함께 살고 있으면서 완벽히는 어렵겠지만 아이에게 감염되지 않도록 기도하는 수밖에 없다.
결핵따위, 이미 정복된 병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면역력의 저하가 병을 좌우한다.
몸을 깍아서라도 아이에겐 영양가 있는 것을 먹이고 있다. 덕분에 얼굴색도 좋고 뺨도 동글동글한 어린애로 자라주어서 괜찮을거라고 믿고 싶다.
[잘 자렴, 아이]
건강한 숨소리를 확인하고서 에이는 만년필을 들어올리며 맛없는 커피를 마셨다.
불에 직접 끓일 수 있는 내열유리용기인 파이렉스의 올드. 혹은 클래식이라고 불리는 이 물건은 1940년부터 1960년대 후반까지 제조된 것을 말한다. 일본에선 일부 열광적인 팬이 있는 듯한데 단순히 새 것을 살 여유가 없어서 계속 써오고 있지만 팔면 조금은 생활에 보탬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곳은 외국이고 이러한 물건에 열을 올리는 사람들도 없다.
1980년대 중반 - 후에 거품경기라고 불리우는 전야의 시대다.
때때로, 신문이나 뉴스에서 가끔씩 보게되는 모국의 들뜬듯한 경기상승에 불안함을 느끼는것은 역시나 에이가 이단이기 때문일까.
무엇보다 이 탁하고 향기도 없는 커피를 마시고 있자면, 이 맛을 처음으로 에이에게 가르쳐 준 그 남자를 떠올리게 된다.
그에게서 도망친지 벌써 20년 가까이 지났구나 하고 떠올려보면 가라앉았던 가슴의 안쪽이 찌릿하게 저린다.
콜록 콜록 기침이 나와서 내장이 떨리는 감각에 뜨거운 한숨이 올라왔다.
구토감을 목 안쪽으로 밀어누른 순간, 좀 전에 삼켰던 『손님』의 정액 냄새까지 올라오는것 같아서 에이는 혐오감에 얼굴을 찡그렸다. 벌컥 커피를 마셔 얼버무린다.
(메구, 미안해. 난 역시 이런 식으로밖에 살아갈 수밖에 없어)
아내로서 오랫동안 곁에 있어주고, 죽기 바로 직전까지 에이에게 살아갈 의미를 안겨주었던 메구미(愛)에게
결국은 변하지 못한 자신에 대해 사죄했다.
이 3년간, 그녀가 죽고나서 에이는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일을 했다.
그림을 그리는것 만으로 먹고 살 수 있을리가 없어 연줄에 의지해 번역일이나 부업까지. 그런대로 건강했을 적에는 일용직같은 일을 할 수 있다면 좀 더 벌 수 있었을테지만, 안타깝게도 힘 쓰는 일에는 맞지가 않았던 듯 해서 결국은 과로로 몸을 망치고 말았다.
마음이 맞는 후원자를 찾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에이보다도 연하지만 큰 화랑의 후계자로 안기기만 하면 에이의 그림을 사 준다.
말라 비틀어진 몸뚱아리에게 사랑을 속삭이며 나에게 오라며 유혹할정도로 진심으로 대해주는건 미안하고 고맙게 생각하고는 있지만 --- 그가 바라는 애정을 되돌려줄 수 없는 이상,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
그래도 한 때 버려지듯이 이 사람 저 사람 상관없이 몸을 맡기던 시절과는 성질이 다르다.
이미 더럽혀진 손과 몸이다. 그래도 아이(藍)를 키우기 위해서는 겉모습에 신경 쓸 여유가 없다.
어차피 오장육부 안쪽까지 더렵혀진 육체일뿐이다. 더러움따위는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를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버려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파파가 사랑하는건 아이뿐이야......]
속삭임은 스스로에게 하는 말 같았다. 방 한구석에 세워 둔 이젤에는 의뢰받은 풍경화. 재미라곤 요만큼도 없는 평범한 그 그림을 파는것도, 몸을 파는 것도, 에이에게 있어선 전부 굴욕이었지만 아이를 건강히 키우기 위해선 사소한 고통이다. 그래도 가끔씩 가슴이 사무치는 밤에는 떠올리기 싫어도 생각나는 말이 있다.
--- 매춘부(hooker)는 육체를 팔고, 창부(prostitute)는 사랑과 꿈을 팔지.
--- 그러니 넌 일류의 창부가 되렴.
남자인 에이에게『그 사람』은 그런 하찮은 말을 했었다.
그 당시의 에이는 손톱 끝까지 그 남자의 것이었다. 『물건』으로서만 존재했었다.
그 이상의 관계와 이유를 거부한것은 서로가 똑같아서였다.
하지만, 그가 사랑해준 육체도 정신도 이제는 썩어가기 일보 직전.
편지같은걸 쓰려고 생각한건 그 때문인지도 모른다. 오늘의 손님도 욕망을 채우기위해서 왔다기보다도 친구인 에이에게 동정을 품고 약간의 돈을 꿔주려고 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마음이 편치 않다면서 입으로 봉사해주겠다고 청한건 에이쪽이었다.
『전략, 후쿠다 코우지님』
계절인사 따윌 생각할 여유도 없었다. 애당초 새해가 밝은지 얼마 안 된 추위 속에서 쓰는 이 편지가 배를 타고서 일본에 도착할쯤에는 계절이 한번 바뀌어 있을테지.
『당신에게 남기는 글을 쓰는것은 이것이 마지막 기회가 될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미련에 연연해함을 알리는 절 어떻게 생각하실지요. 그래도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시간 속에서 생각나는 것뿐이라곤 당신과 보냈던 그날의 일들 뿐이었습니다.』
편지를 쓸 때 후쿠다는 꼭 만년필을 썼었다. 볼펜은 유성잉크가 뭉쳐서 아름답지 않다고 그런 세세한 것까지 신경을 쓰는 그 남자는 아름답고 남자답고 에이에게 있어서 절대적인 존재였다.
『다 지난일을 이제와서야, 하고 웃으실지도 모르겠지만 꼭 지금 알고싶은 것이 있습니다.
어째서 우리들은 당신이 말씀하셨던 "하찮은 세상"에 흔히 있을 법한 다정한 정에 얽매인 관계로 평온하게 지내지 못했던 것일까요. 어째서 저는 당신에게서 도망가는 길을 선택해버린걸까요.』
여기까지 쓰고나서 에이는 자신이 적은 문장을 찢어버렸다.
손끝에 묘한 힘이 돌아 글씨가 떨렸기 때문이다. 기침을 참는 순간 필치가 흩어져서다.
아름답지 않은 이 문자를 후쿠다의 눈에 보여서는 안된다 --- 논리적이 아닌 단지 그렇게 [정해져 있는 것이다]라고 느낀 순간, 역시 그 남자에게서 끝까지 벗어나지 못하는 자신의 마음을 저주스럽게도, 애뜻하게도 여긴다.
깊게 숨을 쉬고서 이제는 차갑게 식은 커피를 마신다. 휴우 하고 숨을 쉬면 방안의 정적이 귓가에 울린다.
쌔액 쌔액 하고 아이의 숨소리가 들린다. 힘이 들어간 어깨가 조금 편안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커피컵을 놓고서 다시 한번 만년필을 쥐었다. 잘못쓰기를 자주 해서는 안된다.
이제 편지지라고 할만한 종이는 앞으로 몇장밖에 남아있지 않다. 잉크의 잔량도 얼마 안된다.
『전략, 후쿠다 코우지님』
올드 파이렉스의 제조가 종료된 1960년대의 후반에 두사람은 만났다.
만나서는 안 될 해후였을지도 모른다.
(2009/06/18 03:28)
[백로시리즈]의 외전 蜜は夜よりかぎりなく의 세가지 단편중 마지막 단편입니다.
백로시리즈의 주인공인 "이치노미야 아이"의 아버지 "에이"의 이야기로 가장 찡하게 울면서 읽었던 부분이라
혼자선 죽을 수 없어! 란 마음에 올립니다만.....어떨지요....(에로씬 어쩔래 나님아....)
읽기전에 미리 [백로 시리즈]를 알고 보시는걸 추천합니다. 드라마시디라는 좋은 물건도 있고 ㅋㅋ
아이의 이름이 하필이면 아이(藍)여서 문맥 전달하기 참 애매하네요 -_-;;;;
그보다 앞으로의 에로를 어찌 할지....(먼눈)
3살짜리 아이의 목소리를 키시오 다이스케로 필터링하시면 지는겁니다.
덧붙여 에이의 CV는 토오치카 코이치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